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하르트 바그너 (문단 편집) ===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매년 여름(7월 ~ 8월) 독일 바이에른주 북쪽에 위치한 소도시 바이로이트(Bayreuth)에서 열리는 ‘바이로이트 축제’는 바그너의 음악과 작품만을 연주, 상연하는 특별한 페스티벌이다. 이 축제에선 무조건 바그너의 작품만을 다룬다. 예를 들자면 바그너의 부인 코지마의 아버지인 프란츠 리스트는 코지마가 페스티발을 주관하는 것을 보러 일부러 왔다. 당시 리스트는 건강이 몹시 악화되어 있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공연을 본 후 쓰러지고 며칠 후인 7월 31일에 세상을 떠났다. 코지마는 리스트의 장례식을 모두 주관했다. 그러나 바이로이트에서 아버지 리스트를 추모하기 위한 어떠한 콘서트의 개최도 거절했다. '''바이로이트는 바그너의 음악만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1876년, 4부작 <니벨룽의 반지>를 무대에 올리면서 시작된 이 페스티벌은 독일과 유럽을 비롯 전세계의 바그너 추종자(일명 ‘[[바그네리안]]’)들이 성지순례하듯 모여들어 바그너의 악극을 관람하는 바그너 예술의 [[메카]]이다. 바그너 사후 그의 부인 코지마가 페스티벌을 주관했으며, 그녀가 죽은 뒤에는 아들 지그프리트가 예술감독을 맡았다. 병약한 지그프리트가 죽자, 그의 부인(즉 바그너의 며느리) 비니프레드가 바이로이트를 이끌었는데, 그녀와 히틀러의 밀월관계는 예술과 정치의 함수관계를 이야기하는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고전적 레퍼토리이다. 2차대전이 끝나자 나치 부역혐의를 받던 비니프레드는 페스티벌의 주도권을 두 아들 - 빌란트와 볼프강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51년부터 재개된 페스티벌은 정치적 색깔을 완전히 배제하고 바그너 드라마를 심리적인 측면에서 파헤쳐 나갔으니, 이를 일컫어 ‘新 바이로이트 양식’이라고 한다. ‘신 바이로이트 양식’을 주도했던 빌란트 바그너가 죽자(66년) 동생 볼프강 바그너가 전권을 쥐게 된다. 볼프강은 동시대의 다양한 해석조류들을 바이로이트 무대에 과감히 수용하였으며, 페스티벌의 대중화를 위해서도 크게 힘써 많은 음반과 영상물들이 만들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